2026년 9월 부흥을 위한
특별 새벽기도회

  1. 특별새벽기도회를  개근하도록 힘을 씁니다.
  2. 성령으로 사는 삶을 사모하고 살아냅니다.
  3. 2026년 자신의 기도제목 세가지와 결단 세가지를 꾸준히 기도하고 실천합니다.
  4. 2026년 자신의 교회 사역과 목장 사역을 잘 감당하고 내년도 사역을 정해 봅니다.
  5. 자신이 품은 VIP 두사람을 위해 기도합니다.
  6. 교회가 부흥되어 100명 교인이 되도록 기도하고 매년 세목장 분가하도록 기도 합니다.
  7. 교회당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효과적으로 잘 사용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

대표기도: 신선미 자매

말씀

창세기 1: 1-2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1일차. 성령님은 누구이신가?

A. 도입(문제 제기)

우리는 매일 성령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지만, 정작 그분이 누구이신지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까? 성령을 그저 신비한 능력이나 은사의 근원 정도로만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성령께서 차지하시는 자리를 바르게 알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B. 핵심 교훈

1. 성령께서는 만물이 창조되기 전부터 성부, 성자와 함께 영원히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1:1-2).

창세기 1 2절의하나님의 신이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루아흐 엘로힘인데, 이는 성령께서 그때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삼위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신 시간의 창조주이시기에, 성령은 우주 만물이 지어지기 전부터 영원히 계셨습니다. 이 진리를 놓치면 교회는성부의 시대, 성자의 시대, 성령의 시대를 억지로 나누어 오늘날을 유독성령의 시대라 부르며 삼위의 조화를 깨뜨리는 잘못에 빠지기 쉽습니다.

니케아 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비롯한 교회사의 위대한 신조들은 한결같이 성령을 성부, 성자와 동등하게 영원하시며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하나님으로 고백해 왔습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거나 성령을 단지 하나님의 능력이나 감화력 정도로 축소하려는 여러 이단적 흐름과 싸우면서, 성령이 인격이시며 참 하나님이심을 지켜냈습니다. 오늘날에도 성령을 비인격적 에너지나 신비한 기운으로 여기는 왜곡은 이러한 고대의 오류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의 구조 또한 이 진리를 증언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수면 위에 운행하시던 성령은 요한계시록 22장에 이르러 신부 된 교회와 함께오라고 부르시는 성령으로 다시 등장하십니다. 창조의 첫 장과 계시의 마지막 장을 함께 여시는 성령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구원 역사 전체를 친히 주관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줍니다.

이 대목에서 특별히 경계해야 할 것은 성부·성자·성령을 시대별로 나누어 이해하는 태도입니다. 성부는 창조와 구약의 시대를, 성자는 구속의 시대를, 성령은 사도행전 2장 오순절 이후의 시대만을 각각 맡아 일하신다고 시대를 구분해 버리면, 이는 사실상 삼신론에 빠지는 것이며 오늘날을 유독성령의 시대라 부르며 삼위의 조화를 깨뜨리는 오류로 이어집니다. 어거스틴은 성삼위 하나님을 창조주(the Creator), 구원자(Redeemer), 성화시키시는 주(Sanctifier)로 구별하여 표현했지만, 이는 사역의 강조점을 나눈 것이지 결코 존재하신 시기를 나눈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그 창조의 사역을 오늘도 계속하셔서, 한 영혼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새 창조(고후 5:17)를 이루어 가시며, 나아가 아담의 범죄로 잃어버린 낙원(Paradise Lost)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낙원(Paradise Restored)으로 지어져 가는 그 크신 구원 역사 전체를 친히 주관하고 계십니다.

2.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므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은 하나의 동일한 체험입니다( 14:16-17).

또 다른 보혜사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와 동일한 인격, 동일한 사랑으로 이제는 성령의 위격 안에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예수님은 영접했지만 성령은 아직 받지 못했다는 식으로 두 체험을 나누어 가르치는 것은 심각한 신학적 오해이며, 오늘날에도 이런 잘못된 가르침이 교계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헬라어보혜사“(파라클레토스)는 본래 법정에서 피고 곁에 서서 그를 변호하고 돕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이를지켜 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선생이라는 풍성한 인격적 표현으로 옮겼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부터 16, 곧 다락방에서의 고별 설교를 통해 자신이 떠나신 후에도 제자들이 결코 고아처럼 버려지지 않을 것을 이 단어로 약속하셨습니다. “또 다른보혜사라는 표현은, 질이 전혀 다른 존재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과 동일한 인격과 사랑을 지니신 분이 이제는 성령의 위격으로 오셔서, 예수님이 하시던 그 위로와 가르침과 변호의 사역을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이어 가신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 9절에서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이는 성령을 받는 일과 그리스도께 속하는 일이 결코 나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흔히 특정 집회에서예수님은 모셨지만 성령은 아직 받지 못했다는 식으로 두 체험을 구분하여 가르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과 다른 별개의 존재처럼 여기는 삼신론적 오류에 빠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그분의 영이신 성령께서 이미 우리 안에 오셔서 거하기 시작하신다고 가르치며, 그때부터 성령께서는 우리를 점점 더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아가도록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신비한 현상이 많이 나타나는 집회라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고 닮아가려는 열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건전한 성령의 역사라 할 수 없습니다.

3. 성령께서는 죄를 깨닫게 하시고,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시고, 마침내 우리를 성화시키시는 사역을 순차적으로 감당하십니다( 16:7-8).

예수님은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시며, 보혜사께서 오시면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16:8). 여기서세상으로 번역된 헬라어코스모스는 아직 거듭나지 못한 영혼의 상태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회개의 사역은 이 세 가지에 집중됩니다. 곧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시고,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이 우리의 구원이 됨을 깨닫게 하시며, 다가올 심판에 대한 정직한 두려움을 통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것입니다.

이 회개의 사역 이후, 성령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이라는 신비 속으로 이끄십니다. 성령은 영이시기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며, 이천 년 전 갈보리에서 있었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사건을 오늘 우리의 실제 경험으로 적용시켜 주시는 중보자(Mediator)이십니다. 이는 우리가 합리적으로 온전히 다 설명할 수는 없어도, 성령의 매개하시는 사역을 통해 실제로 일어나는 영적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연합의 경험은 반드시 성화(Sanctification)의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성령과 인격적으로 교제하며 그분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되며, 이는 에베소서 4 13절이 말하는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와 연합과 성화는 서로 분리된 세 개의 사건이 아니라, 성령께서 한 사람의 전 생애에 걸쳐 이루어 가시는 하나의 연속된 사역입니다. 우리가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으로 신앙생활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부터 성령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더 깊이 연합시키시며 그 연합의 열매로 우리를 날마다 새롭게 빚어 가십니다.

 

C. 적용

1. 나는 성령을 인격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그저 힘이나 감정, 혹은 소유할 수 있는 능력쯤으로 대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2. 성령 체험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아가야 합니다. 어떤 집회에서 신비한 현상만 강조되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열망이 자라지 않는다면, 그것은 건강한 성령의 역사라 할 수 없습니다.

 

D. 결론

성령님은 태초부터 영원히 계신 하나님이시며, 지금 이 순간도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우리 안에 인격적으로 임재하고 계십니다. 오늘 새벽, 우리는 성령을 능력의 도구가 아니라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더 가까이 이끄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새롭게 영접하기를 원합니다.

마침기도: 조영구 목사

오겹줄 나눔

오겹줄 모임을 갖고 오겹줄 모임에서 기도하고 마칩니다.

  1. 감사 나눔으로 시작합니다.

  2. 나는 그동안 성령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고 대해 왔습니까?

  3. 예수님을 믿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이 하나라는 사실이 나의 신앙생활에 어떤 의미를 줍니까?

기도제목

  1. 성령을 인격이신 하나님으로 바르게 알고 인격적으로 교제하게 하소서.
  2. 성령 체험이 깊어질수록 그리스도를 더욱 알아가고 닮아가게 하소서.
  3. 마음에 품고 있는VIP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대표기도: 박지호 형제

말씀

로마서 8:16

바로 그 때에 그 성령이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십니다.

2일차.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

A. 도입(문제 제기)

우리는거듭났다는 말을 자주 사용하지만, 거듭남이 실제로 성령의 어떤 사역인지 분명히 설명할 수 있습니까? 인간의 영과 성령 하나님을 혼동하여 자신의 감정이나 양심의 소리를 성령의 음성으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거듭난 이후에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가지 못하고 여전히 옛 삶의 패턴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B. 말씀의 교훈

1. 성령께서는 죄인을 회개케 하시고 거듭나게 하시는 사역을 하십니다( 8:16).

로마서 8장은하나님의 영인 성령인간의 영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인간의 영, 곧 양심은 타락으로 인해 선악을 겨우 분별하는 정도로 약해졌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김 받을 때 비로소 하나님과 교제하는 본래의 기능을 회복합니다. 거듭남이란 바로 이 무너진 인간의 영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나는 사건입니다.

이 진리는 이미 구약에서도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에스겔 36 26-27절에서 하나님은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거듭남은 단지 도덕적 결심의 변화가 아니라, 죽었던 영이 성령의 능력으로 새롭게 창조되는 초자연적 사건이며, 이 사건의 주체는 오직 성령이시지 인간의 의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일방적(monergistic) 사역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 영을 살릴 수 없으며, 오직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의 주권적 은혜로만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놓치면 우리는 거듭남조차 자신의 공로나 결단의 결과로 오해하게 되고, 결국 은혜의 복음을 왜곡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거듭나게 하시는 사역은 한순간에 그치지 않고 세 단계로 깊어져 갑니다. 첫째는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를 향한 회개의 사역으로, 성령께서는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16:8) 세상을 책망하심으로 죄인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이끄십니다. 둘째는 거듭난 이후에도 우리 속에 남은 죄성을 계속 지적하시고 회개케 하시는 사역이며, 셋째는 마침내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도록 촉구하시는 사역입니다. 이 사실을 놓치면 우리는 마치 구원의 확증만 받으면 더 이상 회개가 필요 없다고 여기는 위험한 신앙에 빠지기 쉽습니다.

2. 성령께서는 거듭난 안에 인격적으로 내주하시며 날마다 인도해 가십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8:14)는 말씀처럼, 거듭남은 단회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성령의 지속적인 인도하심 아래 사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청교도들은 이양심 신학을 깊이 연구하여, 거듭난 양심이 얼마나 예민하게 죄를 깨닫고 하나님과 교제하는지를 설교 속에 생생히 담아냈습니다.

로마서 8 15절의양자의 영“(, 후이오테시아의 영)은 노예의 영과 대조됩니다. 종은 두려움으로 주인을 섬기지만, 자녀는 사랑과 신뢰 가운데 아버지께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습니다. 청교도들은 구원의 확신을 두 단계로 구분하였는데, 첫째는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므로 나는 구원받았다는 삼단논법과 같은 논리적 확신이요, 둘째는 성령께서 직접적, 즉각적으로 우리 영과 더불어 주시는 충만한 확신입니다. 논리적 확신만으로는 완전한 확신에 이르지 못하며, 성령께서 친히 우리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실 때 비로소 흔들림 없는 확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이 인도하심은 자동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기도 안에서 날마다 새롭게 순종함으로 경험되는 것입니다. 거듭난 자라도 성령을 소멸하거나 근심하게 하면 그 인도하심에 둔감해질 수 있기에, 우리는 매일 아침 다시금 성령께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내어드려야 합니다. 창세기 5 24절의 에녹처럼하나님과 동행하는, 곧 성령과 순간마다 동행하는 삶이야말로 우리 경건과 사역의 가장 핵심적인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3. 성령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살게 하시며, 인도하심을 바르게 분별하는 지혜를 주십니다(고후 5: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하지만, 이 구절 바로 앞의 문맥을 놓치면 그 의미가 가볍게 다루어지기 쉽습니다. 고린도후서 5 15절은그리스도인이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자라고 정의합니다. 곧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선언은 주님께 대한 온전한 헌신을 이미 전제하고 있는 것이며,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다는 고백 위에서만 의미를 갖습니다.

그런데 이 거듭난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성도들은 종종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해 오해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계시를 받았다는 식의 표현은 우리 교계를 상당히 혼잡하게 하고 위험스럽게 만들어 왔습니다. 계시라는 말은 본래 시대를 초월하는 객관적 진리인 성경 말씀을 가리키는 용어이지, 개인의 기도 중 떠오른 생각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분별할 때 최소한 두 가지 기준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첫째는 그 인도하심이 성경의 정신과 합치되는가 하는 것이며, 둘째는 그것이 회복된 양심 안에서 담대함으로 받아들여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께서는 결코 성경과 어긋나는 메시지를 주실 수 없기 때문에, 이 두 기준이 함께 충족될 때에만 우리는 안심하고 그 인도하심을 따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인도하심이란 어떤 특별하고 예외적인 신비 체험을 통해서만 임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기도와 회복된 양심이라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영혼의 기능을 통해 날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르게 이해할 때 우리는 막연한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성령과 인격적으로 동행하는 담대한 확신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C. 적용

1. 나는 나의 감정이나 직관을 성령의 음성과 혼동하지 않고, 말씀과 기도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분별하려고 애쓰고 있습니까?

2. 거듭남이 과거의 한 순간에만 머물러 있지 않도록, 오늘도 성령의 인도하심에 새롭게 순종하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D. 결론

거듭남은 죽었던 우리의 영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나 하나님의 자녀로 확증되는 은혜의 사건입니다. 오늘도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인도해 가시도록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열어드리기를 원합니다.

마침기도: 조영구 목사

오겹줄 나눔

오겹줄 모임을 갖고 오겹줄 모임에서 기도하고 마칩니다.

  1. 감사 나눔으로 시작합니다.

  2. 나의 거듭남의 체험을 돌아볼 때, 성령께서 나를 어떻게 회개로 이끄셨습니까?

  3. 최근 성령의 인도하심을 분명히 느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기도제목

  1. 나의 양심이 항상 성령 앞에 민감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살게 하소서.

  2. 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합니다.

  3. 마음에 품고 있는 VIP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대표기도: 이현지 자매

말씀

요한복음 5: 1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3일차.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맺는 열매

A. 도입(문제 제기)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고 애쓰면서도 정작 그 열매가 어디서 흘러나오는지 놓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 희락, 화평의 열매를 나의 노력과 결심만으로 맺으려 하다가 지쳐버린 적은 없습니까? 그리스도와의 연합 없이 열매만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B. 말씀의 교훈

1. 열매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흘러나옵니다( 15:5-7).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은 성령에 대해 집중적으로 가르치는성령장인데, 그 한가운데 15장의 포도나무 비유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이 성령 생활의 핵심임을 보여줍니다. 가지가 나무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듯이,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으면 어떤 선한 열매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포도나무 비유는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부터 이어져 온 이스라엘에 대한 상징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사야 5장과 시편 80편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심으신 포도나무로 묘사하지만, 그 포도나무는 들포도만 맺어 하나님을 슬프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를참 포도나무라 부르신 것은, 옛 이스라엘이 이루지 못한 열매 맺는 삶을 이제 자신 안에서 성취하시고, 그 안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참된 열매를 맺게 하시겠다는 선언입니다.

본문에서 반복되는 헬라어 동사메노‘(머물다, 거하다)는 단순한 방문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인격적인 연합을 뜻합니다. 이는 일회적인 신앙 체험이 아니라, 날마다 말씀과 기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친밀히 동거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열매는 이 지속적인거함의 자연스러운 결과이지, 별도의 노력으로 얻어내는 성과물이 아닙니다.

이 진리를 믿고 아는 것은 단지 교리적 지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능력 있는 삶의 비결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1장에서너의 마음의 눈을 밝혀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도했던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그분께 순종하면 순종할수록 우리 안에 있는 영생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는 더욱 깊어져 갑니다. 실제로 18세기 존 웨슬리의 각성 운동,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흥, 19세기 찰스 피니의 회개 운동에 이르기까지, 역사 속 모든 복음적 부흥의 공통된 핵심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바로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진리가 신자들의 삶 속에 온전히 드러나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2. 요한은 특별히 사랑을 성령 사역의 핵심으로 제시합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5:5)라는 말씀처럼, 성령의 열매는 결국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매 맺는 삶의 목표는 도덕적 완성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 22-23절이 나열하는 아홉 가지 열매는 서로 다른 아홉 개의 열매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뻗어 나온 다양한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헬라어카르포스‘(열매)가 단수형으로 쓰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 아홉 가지는 그리스도의 영이 지니신 하나의 품성이 여러 얼굴로 드러난 것이기에, 어느 하나는 나오고 어느 하나는 안 나오는 식으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헬라어아가페는 감정에 좌우되지 않고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의지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을 뜻하며, 이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노래한 사랑과 동일한 성격의 사랑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 어떤 열매의 부족을 느끼든, 그 해답은 그 열매 하나만을 따로 떼어 훈련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 더 깊이 거하여 그분의 사랑을 더 풍성히 공급받을 때, 나머지 모든 열매도 함께 자라나게 됩니다.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까지가 요한의성령장이라 불리는 가운데 그 한가운데 포도나무 비유가 놓여 있다는 사실은, 성령과의 인격적 교제와 사랑의 연합이 성령 생활 전체를 떠받치는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을 잘 보여 줍니다.

3.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에 우리가 실제로 동참하는 영적 사실입니다( 6:3-11).

바울은 로마서 6 3절에서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반문합니다. 이는 신자가 그리스도의 죽으심(3), 장사 지내심(4), 부활(5)에 실제로 연합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연합은 우리의 감정이나 노력으로 이루어 낸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께 접붙이심으로 이루신 하나의 객관적이고 영적인 사실입니다.

11절의여길지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로기조마이는 회계 장부에 정확한 숫자를 기록하듯 확정하여 계산한다는 뜻을 지닌 단어입니다. 이는 막연한 추측이나 소망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확정된 사실을 믿음으로 정확하게 헤아려 붙잡으라는 명령입니다. 우리가 죄와 씨름하다 자주 넘어지는 근본 이유는 의지력의 부족이 아니라, 바로 이 객관적 사실을 믿음으로 정확히 계산하지 못하는 데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갈라디아서 5 24절에서는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하여, 로마서의 수동태 표현과 달리 능동태로 우리의 십자가 죽음을 묘사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수동적 진리를, 이제 우리가 마치 스스로 못 박은 것처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고백하며 살아가야 함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매 맺는 삶을 추구하기에 앞서, 먼저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영적 사실을 정확하게 계산하고 담대하게 고백하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이 고백이 확실할수록 우리 안에서 자라나는 성령의 열매도 더욱 견고하고 흔들림 없는 것이 됩니다.

 

C. 적용

1. 나는 열매를 맺기 위해 내 힘으로 애쓰기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거하는시간말씀 묵상과 기도을 얼마나 확보하고 있습니까?

2. 오늘 하루, 내가 맺어야 할 열매 중 가장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성령께 여쭙고 그 부분에서 그리스도께 더 깊이 연합되기를 구해야 합니다.

 

D. 결론

성령의 열매는 우리의 결단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살아 있는 연합에서 자라납니다. 오늘도 포도나무 되신 그리스도 안에 깊이 거함으로, 우리의 삶에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가 풍성히 맺히기를 원합니다.

마침기도: 조영구 목사

오겹줄 나눔

오겹줄 모임을 갖고 오겹줄 모임에서 기도하고 마칩니다.

  1. 감사 나눔으로 시작합니다.

  2. 나의 삶에서 가장 자라나 있는 성령의 열매와 가장 부족한 열매는 무엇입니까?

  3. 그리스도 안에거한다는 것이 나의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입니까?

기도제목

  1.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 성령의 열매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하소서.

  2. 주일예배의 부흥을 위해 기도합니다.

  3. 마음에 품고 있는 VIP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대표기도: 김진아 자매

말씀

에배소서 5: 18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4일차. 죄를 이기는 거룩한 삶

A. 도입(문제 제기)

우리는 왜 거듭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같은 죄와 씨름하며 넘어지는 것일까요? 성결한 삶이 나의 의지력과 결단만으로 가능하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B. 말씀의 교훈

1. 성결의 삶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옛사람에 대한 참된 인정에서 시작됩니다( 6:6, 11).

로마서 6장은 우리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이는 단지 교리적 지식이 아니라, 날마다나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6:11)라고 스스로에게 선포해야 할 살아 있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여기서여길지어다로 번역된 헬라어로기조마이는 회계 장부에 정확한 사실을 기록하는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는 우리의 감정이나 경험과 무관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객관적 사실옛사람의 죽음과 새사람의 부활을 믿음으로 확정하여 붙드는 행위입니다. 죄와 씨름할 때 우리가 실패하는 근본 이유는 대개 의지력의 부족이 아니라, 이 객관적 사실을 믿음으로 붙들지 못한 데 있습니다.

옛사람의 죽음을 인정한다는 것은 단순한 심리적 자기암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우리가 실제로 연합되었다는 성경적 진리에 근거합니다. 그러므로 성결의 삶은 새로운 규율을 지키려는 노력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어진 일을 날마다 믿음으로 재확인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 옛사람의 죽음에 대한 이해를 두고 웨슬리안과 개혁파(케직) 사이에는 오랜 신학적 대화가 있어 왔습니다. 웨슬리안은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성경의 선언을 그대로 영적 사실로 고백하며 이를 죄성 제거설(Eradication)이라 불렀고, 케직 계통은 우리 속에 죄성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음을 경험적으로 인정하면서도 그 진리를 계속 적용할 때 죄를 이기는 승리를 경험하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이 두 관점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는 영적 사실의 차원을, 하나는 경험의 차원을 강조한 것으로서 함께 놓고 볼 때 우리는 만족할 만한 승리의 경험에 이르게 됩니다.

2. 성결한 삶은 온전한 헌신을 통해 성령충만함으로 나타납니다( 5:18-21).

바울은 술 취함과 대조하여 성령충만을 명령형으로 제시하는데, 이는 우리 자신을 온전히 성령의 통치 아래 내어드리는 지속적 결단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8장의생명의 성령의 법은 바로 이 헌신된 삶 속에서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에베소서 5 18절의 헬라어 동사플레루스테는 현재 수동태 명령형으로서,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계속해서 채움을 받으라는 지속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술에 취한 사람이 술의 지배를 받아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과 정반대로, 성령의 지배 아래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계속해서 내어드리는 삶을 요구합니다.

이 헌신은 특정한 죄의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삶 전체를 향한 것이어야 합니다. 옛사람의 죽음을 믿음으로 선포하는 것과 성령충만을 위해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은 결코 별개의 두 단계가 아니라, 하나의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리를 인정하는 만큼, 그 자리는 성령께서 다스리시는 자리로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6 13절의드리라는 헬라어 부정과거 시제로서,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행위가 아니라 단번에, 순간적으로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결단을 강조합니다. 우리 몸을 더 이상 죄에게 내어주는 무기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진 의의 병기로 삼는 이 순간의 결단이, 이후 지속적인 성화의 삶으로 이어지는 출발점이 됩니다.

3. 칼빈과 웨슬리의 구원론은 죄와 은혜를 이해하는 강조점에 차이가 있으나, 서로를 보완하여 온전한 이해에 이르게 합니다.

칼빈은 인간의 모든 범죄를 의지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통틀어 죄로 보는직렬 배치된 죄론을 취한 반면, 웨슬리는 죄를 자유의지로 유혹에 동의하는 고범죄(willful sin), 일생 동안 계속되는 연약함으로서의 허물(error)로 나누는병렬 배치된 죄론을 취했습니다. 야고보서 1 14-15절에 따르면, 유혹이 다가올 때 우리 속에 성결함이 있으면 그 유혹을 자유의지로 받아들이지 않게 되는데, 웨슬리는 바로 이 고범죄로부터의 자유를 성결의 체험이라 불렀습니다.

이 차이는 17세기 알미니우스와 칼빈주의자들의 논쟁, 그리고 18세기 웨슬리의 구원론으로 이어지는 유서 깊은 신학적 대화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칼빈주의의 다섯 강령은 인간의 전적 부패, 무조건적 선택, 제한된 속죄, 불가항력적 은총, 성도의 견인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부각시킵니다. 반면 웨슬리는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인정하면서도, 조건적 선택과 무제한의 속죄, 저항할 수 있는 은혜, 그리고 구원의 확신을 강조하여 인간의 자유의지가 감당하는 몫을 함께 조명했습니다.

이 두 흐름은 서로 물과 기름의 관계가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큰 틀에서 볼 때 전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속한 일이지만, 우리가 날마다 유혹과 씨름하는 인간의 기능적 차원에서는 자유의지의 문제를 결코 외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굳게 붙들면서도 동시에 우리의 의지적 결단을 소홀히 하지 않을 때, 우리는 만족할 만한 성화의 신학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와 씨름하며 실패할 때, 이를어차피 죽을 때까지 죄인일 뿐이라는 체념으로 받아들여서도 안 되고, 반대로 한 번의 결단으로 모든 유혹이 영원히 사라진다는 성급한 확신에 머물러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신뢰하는 동시에, 날마다 우리의 자유의지를 성령께 복종시키는 이 두 진리를 함께 붙드는 것이 성결한 삶의 균형 잡힌 길입니다.

 

C. 적용

1. 나는 특정한 죄와 씨름할 때, 내 의지로 싸우기 전에 먼저나는 이 죄에 대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선포하고 있습니까?

2. 오늘 나의 삶의 어느 영역을 아직 성령께 온전히 내어드리지 못하고 있는지 정직하게 점검해야 합니다.

 

D. 결론

거룩한 삶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연합의 진리를 믿음으로 붙잡을 때 흘러나옵니다. 오늘도 옛사람을 못 박으신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라 죄를 이기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마침기도: 조영구 목사

오겹줄 나눔

오겹줄 모임을 갖고 오겹줄 모임에서 기도하고 마칩니다.

  1. 감사 나눔으로 시작합니다.

  2. 내가 반복적으로 넘어지는 죄의 영역에서, 옛사람의 죽음을 믿음으로 어떻게 적용할 수 있습니까?

  3. 성령께 온전히 헌신한다는 것이 나의 삶에서 무엇을 의미합니까?

기도제목

  1. 삶의 모든 영역을 성령의 통치 아래 온전히 내어드리게 하소서.

  2. 늘 합심하여 기도하며 응답받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3. 마음에 품고 있는 VIP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대표기도: 이도 형제

말씀

에배소서 5: 18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5일차. 채움 받은 삶, 복종하는 삶

A. 도입(문제 제기)

우리는 성령충만을 마치 물을 채우듯 20%, 50%, 100%로 채워가는 물량적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령충만한 상태와 그렇지 못한 상태를 분별할 수 있는 성경적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까? 성령충만을 신비한 체험으로만 여기고, 일상의 순종과는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B. 말씀의 교훈

1. 성령충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붙잡힌상태 말합니다( 5:18).

성령충만은 우리 안에 무언가를 주입받는 물량적 개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인격적으로 붙잡히고 복종되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한 상태가 있고, 그것을 잃어버린 상태도 있을 수 있습니다.

충만함을 받으십시오에 해당하는 헬라어플레루스테는 현재 시제 명령형으로, 한 번으로 완결되는 사건이 아니라계속해서 채워지는 상태에 머물러 있으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배의 돛이 바람을 받는 동안에만 배를 밀고 가는 것처럼, 성령충만도 매 순간 성령께 자신을 내어드리는 관계 안에서만 지속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성령충만을 한 번의 특별한 집회나 체험을 통해 영구적으로 얻어지는 것으로 오해하면, 이후의 삶에서 나타나는 실패와 연약함 앞에서 신앙의 혼란을 겪게 됩니다. 오히려 성경은 성령충만을 날마다, 순간마다 새롭게 구하고 유지해야 할 삶의 자세로 가르칩니다.

신학자 스티븐 하퍼는 이를 두고시간 중심의 영성삶 중심의 영성을 구분했습니다. 시간 중심의 영성은이때는 기도하는 시간, 이때는 일상의 시간으로 나누어 여전히 내가 나를 다스리는 삶이지만, 삶 중심의 영성은 주체가 완전히 바뀌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입니다. 성령충만은 바로 이 삶 중심의 영성으로 전적으로 옮겨 갈 때에만 지속될 수 있습니다.

2. 성령충만은 그리스도께 온전히 복종하고 성령과 친밀히 교제하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바울은 성령충만의 열매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화답함, 범사에 감사함,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함을 제시합니다( 5:19-21). 즉 성령충만은 신비한 감정 체험이 아니라, 찬양과 감사와 순종과 섬김으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삶의 열매입니다.

특히 21절의피차 복종하라는 헬라어 분사휘포타쏘메노이는 명령형이 아니라 앞선 성령충만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삶의 태도를 묘사합니다. 이는 성령충만이 개인의 내면적 만족에 머무르지 않고, 반드시 가정과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섬기는 구체적 관계로 나타나야 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성령충만한지를 그의 신비한 체험의 강도가 아니라, 그가 얼마나 감사하며 찬양하며 겸손히 섬기는가로 분별해야 합니다. 한국교회 안에 때로 성령충만을 극적인 현상과 동일시하는 오해가 있지만, 에베소서 본문은 오히려 일상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성숙한 순종을 성령충만의 참된 증거로 제시합니다.

이 확인은 데살로니가전서 5 16-18절의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통해 아주 구체적으로 점검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감성이 늘 주님을 향한 기쁨으로 채워져 있는지, 우리의 지성이 쉬지 않는 기도로 열려 있는지, 우리의 자유의지가 모든 환경 속에서 감사로 반응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마치 리트머스 종이처럼 지금 내가 성령의 충만한 상태 안에 있는지를 스스로 확인할 수 있게 해 줍니다.

3. 성령충만의 가지 특성은 인격성과 정결과 능력입니다(3-P 성령론).

성령충만한 삶의 특성은 인격성(Personality), 정결(Purity), 능력(Power)이라는 세 단어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 세 측면은 성경의 서로 다른 본문들 속에 각각 집중적으로 나타나 있어서, 우리가 성경 전체를 통전적으로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먼저 인격성은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에 집중적으로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까지 예수님이 반복해서 소개하시는보혜사“(파라클레토스)라는 표현이 그 대표적인 예이며, 이는 성령이 하나의 힘이나 세력이 아니라 우리와 인격적으로 교제하시는 분임을 강조합니다. 다음으로 정결은 바울서신, 특별히 로마서 6장부터 8장에 걸쳐 집중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죄의 몸이 멸하여지고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라 살아가는 거룩한 삶이 바로 이 정결의 차원입니다.

마지막으로 능력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그리고 바울서신 일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위로부터 능력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라“( 24:49)는 말씀과 오순절 이후 나타난 두나미스의 역사가 그 대표적인 예이며, 이는 복음 전파와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원동력이 됩니다.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에만 치우친 성령론은 반드시 균형을 잃게 됩니다. 인격성만 강조하면 능력을 잃은 정적인 신앙에 머물게 되고, 능력만 강조하면 인격적 교제와 거룩함을 소홀히 하는 위험한 열광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한 교단이나 전통의 강조점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이 세 가지가 함께 균형 있게 자라나는 통전적 성령충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C. 적용

1. 나는 성령충만을 신비한 느낌으로만 찾지 않고, 날마다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구체적 순종으로 추구하고 있습니까?

2. 오늘 나의 삶 속에서 찬양과 감사와 서로 복종함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D. 결론

성령충만은 신비한 양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에 붙잡혀 그분께 온전히 복종하는 상태입니다. 오늘도 찬양과 감사와 순종으로 나타나는 성령충만한 삶을 사모하며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마침기도: 조영구 목사

오겹줄 나눔

오겹줄 모임을 갖고 오겹줄 모임에서 기도하고 마칩니다.

  1. 감사 나눔으로 시작합니다.

  2. 나는 성령충만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추구해 왔습니까?

  3. 최근 나의 삶에서 찬양·감사·복종이라는 성령충만의 열매가 나타난 순간이 있었습니까?

기도제목

  1. 성령충만을 물량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온전한 복종으로 추구하게 하소서.

  2. 찬양과 감사와 섬김이 삶 속에 자연스럽게 흘러넘치게 하소서.

  3. 마음에 품고 있는 VIP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대표기도: 서가영 자매

말씀

고린도전서 12: 13

우리는 유대 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또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6일차. 능력 받아 그리스도의 증인 되다

A. 도입(문제 제기)

우리는 성령세례와 성령의 나타남을 단지 신비한 체험으로만 여기며 신학적 진리는 소홀히 하고 있지 않습니까? 반대로 교리적 지식만 붙잡고 실제 삶 속에서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 채 메마르게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령의 능력을 구하는 목적이 나 자신의 유익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증인 되는 것인지 우리는 정직하게 물어본 적이 있습니까?

 

B. 말씀의 교훈

1. 성령세례는 그리스도와 몸이 되는영적 사실의 차원 실제로 능력이 나타나는경험의 차원 함께 존중되어야 합니다(고전 12:13).

이 두 차원 중 어느 하나에만 치우치면 온전한 성령의 삶이라 할 수 없습니다. 성경적 지식만 있고 삶 속의 능력이 없거나, 반대로 체험만 있고 성경적 이해가 없다면 둘 다 균형을 잃은 것입니다.

세례를 받아에 해당하는 헬라어밥티조는 본래 어떤 것에 완전히 잠기거나 동화되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성령세례가 특정 은사 체험 이전에 모든 신자가 예외 없이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지는 근본적 사건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즉 성령세례는 소수의 특별한 신자만 받는 이차적 축복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됨의 출발점에서 이미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은혜입니다.

동시에 한국교회는 역사적으로 냉랭한 교리적 정통주의와 뜨거운 체험 중심의 신앙 사이에서 자주 균형을 잃어 왔습니다. 성경적 지식에 근거하지 않은 체험은 쉽게 미혹에 빠지고, 체험 없는 지식은 능력을 잃은 형식주의로 굳어집니다. 참된 성령의 삶은 이 두 차원이 서로를 바로잡으며 함께 자라가는 데 있습니다.

실제로 성령세례에 대한 이해는 교회사 속에서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왔습니다. 하나는 성경 원론대로 성령세례를 중생의 순간과 동일시하는 관점이며, 또 하나는 무디, 토리, 앤드류 머레이 등 많은 부흥사들이 강조했던 것처럼 중생 이후 별도의 경험으로서 사역의 능력을 위해 성령세례(혹은 성령충만)를 구별하여 강조하는 관점입니다. 이 두 관점은 서로 싸워야 할 것이 아니라, 성령세례의 본질(중생)과 그 능력의 경험적 차원을 함께 붙들 때 비로소 온전한 이해에 이르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시점을 언제로 규정하느냐가 아니라, 성령을 받은 자로서 실제로 그 능력이 삶과 사역 속에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3. 성령세례에 대한 강조는 한국교회 초기 역사의 뿌리와도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19세기 후반 미국과 영국의 부흥운동에서 은혜를 받고 우리나라에 온 많은 선교사들은 성령충만과 성령세례의 복음에 매우 익숙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전해 준 신앙이 오늘 한국교회 보수적 성령 신앙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평양 장로회 신학교 초창기에는 성령세례를 거듭남과 구별하여 그 능력을 강조하는 성령론 교재가 사용되었고, 이 학교를 거쳐 간 초기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배우고 전국을 다니며 성령세례의 능력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러한 흐름과는 별개로, 어떤 개혁주의 신학자들 사이에는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가 사도 시대와 함께 그 사명을 다했다고 보는 은사중지론(cessationism)이 자리 잡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를 지나치게 신념적으로 받아들이면, 오늘날에는 성령의 초월적 은사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단정하게 되어 성경이 증언하는 살아 있는 성령의 능력을 스스로 제한하게 되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편으로는 성령세례와 능력에 대한 뜨거운 강조가 우리 신앙의 역사적 뿌리임을 존중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 능력이 결코 특정 시대에만 국한되지 않았음을 함께 붙들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각 사람에게도 여전히 동일한 성령께서 동일한 능력으로 함께하고 계십니다.

2.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의 본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비밀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능력의 목적은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토기장이 되신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사역의 모든 능력은나를 통해서가 아니라주님의 사역이라는 겸손한 고백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사도행전 1 8절의권능“(, 뒤나미스)은 자기 과시나 개인적 성공을 위한 힘이 아니라, 오직증인이 되리라는 목적을 위해 주어진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승천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능력을 약속하시되, 그 능력의 방향을 분명히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증거 사역에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사모할 때, 그 마음의 중심을 늘 점검해야 합니다. 능력을 구하는 동기가 자신의 신앙적 만족이나 다른 이들 앞에서의 인정에 있다면, 그것은 이미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능력과는 방향이 어긋난 것입니다. 참된 성령의 능력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분의 증인 되게 하는 방향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고린도전서를 보면 은사에 관한 12장과 14장 사이에 사랑을 노래하는 13장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구조 자체가 깊은 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방언과 예언의 은사,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선언은, 성령의 능력과 은사가 언제나 사랑이라는 동기 위에서만 바르게 행해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요한복음 14장과 16장 사이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다루는 15장이 놓여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능력과 은사를 다루는 본문들 한가운데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C. 적용

1. 나는 성령의 능력을 구할 때, 나 자신의 만족이나 인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증인 되기 위함이라는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까?

2. 성령의 은사와 나타남을 사모하되, 그것이 반드시 성경적 진리 위에 서 있는지 늘 분별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D. 결론

성령의 능력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실한 증인으로 세우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 자신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진흙 같은 우리를 빚으시는 토기장이 되신 주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리기를 원합니다.

마침기도: 조영구 목사

오겹줄 나눔

오겹줄 모임을 갖고 오겹줄 모임에서 기도하고 마칩니다.

  1. 감사 나눔으로 시작합니다.

  2. 나는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구하는 목적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3. 영적 사실의 차원과 경험의 차원 중, 나에게 더 부족한 부분은 무엇입니까?

기도제목

  1. 성령의 능력을 구하는 목적이 항상 그리스도의 증인 됨에 있게 하소서.

  2. 담대하게 전도하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3. 마음에 품고 있는 VIP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대표기도: 이진행 형제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5: 23

평화의 하나님께서 친히, 여러분을 완전히 거룩하게 해 주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흠이 없이 완전하게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7일차. 온전케 하시는 치유의 성령

A. 도입(문제 제기)

우리는 영··육 중 어느 한 부분의 아픔만 다루고, 사람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치유를 놓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육체의 질병과 내면의 상처, 그리고 영적 억압을 서로 분리된 문제로만 다루고 있지는 않습니까? 치유를 구하면서도 정작 성령과 악한 영을 분별하는 지혜는 부족하지 않습니까?

 

B. 말씀의 교훈

1. 하나님은 우리를 ·· 전인적으로 다루십니다(살전 5:23-24).

어떤 신학 전통은 인간을 이분설로, 어떤 전통은 삼분설로 이해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나누어 다루지 않으시고 전인격적으로 온전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치유는 몸만이 아니라 내적 상처와 영적 억압까지 포괄하는 총체적 회복입니다.

살전 5 23절에서완전히 거룩하게로 번역된 헬라어 표현은홀로텔레이스라는 단어에서 온 것으로, ‘전체를 남김없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울이 영과 혼과 몸을 나란히 언급한 것은, 인간 존재의 구성 요소를 정확히 분석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게 하시는 은혜가 사람의 어느 한 부분도 남겨두지 않고 전 존재에 미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의 질병만을 위해 기도하고 내면의 상처는 방치하거나, 반대로 심리적 회복만을 추구하며 신체적·영적 문제를 도외시하는 편향된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성령께서 원하시는 치유는 언제나 사람 전체생각과 감정과 몸과 영적 상태를 향한 것입니다. 영의 구원은 거듭나는 순간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순간적 사건이지만, 혼의 치유는 일생에 걸쳐 지속되는 과정입니다. 우리의 감정과 기억 속에 남은 죄책감, 우울, 열등감, 수치심과 두려움 등은 성령께서 우리를 깨닫게 하실 때마다 하나씩 주님 앞에 내려놓고 고백함으로써 점진적으로 치유되어 가며, 이것이 곧 내적 치유의 여정입니다.

2. 성령은 우리의 내적 치유와 육체적 치유를 동시에 이루어 가시며, 동시에 우리에게 성령과 악령을 분별하는 지혜를 요구하십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무분별한 열광주의와 메마른 정통주의라는 양극단 사이에서 균형을 잃기 쉽습니다. 진정한 치유 사역은 성경적 토대 위에서 성령의 살아 있는 능력을 인정하는 균형 잡힌 신앙에서 나옵니다.

요한일서 4 1절은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가 시험하라고 명령합니다. 이는 신비한 현상이 나타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성령의 역사라고 성급히 단정해서는 안 됨을 보여줍니다. 참된 성령의 치유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높이고, 성도를 말씀 순종과 거룩함으로 이끄는 방향으로 나타납니다. 육체의 치유에 대해서도 우리는 몇 가지 그릇된 신념을 경계해야 하는데, 모든 질병을 무조건 마귀의 역사로 단정하는 것, 의학과 의술을 부정하는 것, 신유의 은사를 특정인의 전유물로 여기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좋은 의사를 통해 병을 고치신다면 그 역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며, 때로는 사도 바울의 육체의 가시처럼 연약함 가운데 머물게 하심으로써 오히려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이끄시기도 합니다.

반대로 병리적 두려움이나 신비주의에 사로잡혀 모든 초자연적 현상을 무조건 배격하는 것 역시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씀의 기준으로 영을 분별하는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도, 성령께서 지금도 사람의 영과 혼과 몸을 온전하게 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귀(단수)와 귀신들(복수)은 성경에서 구분되어 쓰이는 용어이며, 억울하게 죽은 영혼이 귀신이 된다는 식의 무속적 귀신 관념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성령을 모신 우리에게는 이미 악한 영을 대적할 권세가 주어져 있으나( 12:28), 그 사역은 언제나 사역자 자신이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기도받는 사람 자신의 자유의지적 회개와 결단을 동반하며, 사역 이후 말씀과 공동체 안에서 지속적으로 양육되는 과정과 함께 이루어져야 온전한 회복에 이르게 됩니다.

3. 성령께서는 시련과 일상적인 삶의 여러 통로를 통해서도 우리의 내적 치유와 회복을 이루어 가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 8-9절에서 아시아에서 당한 극심한 환난으로 살 소망마저 끊어질 지경에 이르렀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는 곧이어 그 이유를 밝히는데, 그것은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시련은 언제나 우리를 자기 신뢰로부터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로 옮기시려는 치유의 목적을 담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 2-3절 역시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앎이라고 가르칩니다. 시련을 온전히 기쁘게 여길 수 있는 것은, 그 인내의 훈련이 결국 우리를 더 성숙하고 부족함 없는 영성으로 자라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경은 꿈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사례들을 여러 곳에서 보여 줍니다. 다만 우리가 꾸는 모든 꿈이 다 성경에 기록될 만한 신령한 계시라고 여겨서는 안 되며, 일반적인 꿈은 대개 하루 동안의 심리적 경험이 정리되며 치유와 회복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초대교회 당시 몬타누스파가 극단적으로 개인적 계시와 꿈을 주장하다가 이단으로 정죄된 이후, 교회는 오랫동안 꿈에 대한 신학적 논의 자체를 조심스럽게 피해 왔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정신분석학의 발전과 더불어 신학계에서도 이 주제를 다시 조심스럽게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든 성경의 기준을 벗어난 신비 체험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시련이든 꿈이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 앞에 더 가까이 이끄시는 통로로 사용하실 수 있음을 겸손히 인정하는 균형 잡힌 자세입니다.

 

C. 적용

1. 나는 나 자신이나 이웃의 아픔을 다룰 때, 몸의 문제만이 아니라 내면과 영적 상태까지 함께 살피고 있습니까?

2. 신비한 현상에 쉽게 이끌리기보다, 성경의 기준으로 영적 분별을 훈련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D. 결론

성령은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을 흠 없이 온전하게 보전하기를 원하시는 신실하신 치유자이십니다. 오늘도 우리의 전 존재를 붙드시는 성령께 우리의 아픔과 연약함을 온전히 맡기기를 원합니다.

마침기도: 조영구 목사

오겹줄 나눔

오겹줄 모임을 갖고 오겹줄 모임에서 기도하고 마칩니다.

  1. 감사 나눔으로 시작합니다.

  2. 나의 삶에서 아직 치유되지 않은 영··육의 영역은 어디입니까?

  3. 나는 영적 분별에 있어 열광주의와 정통주의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 치우쳐 있습니까?

기도제목

  1. 나의 영과 혼과 몸을 온전히 치유하시는 성령의 손길을 경험하게 하소서.

  2. 수요기도회에서 영어회중과 한어회중이 한마음으로 뜨겁게 기도하게 하소서.

  3. 목장의 VIP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대표기도: 강예선 자매

말씀

디모데후서 2: 15

그대는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는, 부끄러울 것 없는 일꾼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기를 힘쓰십시오.

8일차. 바르게 분별하고 굳게 서다

A. 도입(문제 제기)

우리는 극단적인 영성 운동과 이단을 분별할 수 있는 일치된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까? 혹시 나만의 기준으로 쉽게 남을 이단이라 정죄하거나, 반대로 무분별하게 모든 것을 수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의 신앙이 특정 시대나 특정 교단에만 치우친 반쪽짜리 성령론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B. 말씀의 교훈

1. 한국교회는 이단과 극단적 영성운동을 분별하는 일치된 기준이 부족하여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딤후 2:15).

어떤 이는 기독론으로, 어떤 이는 사도신경으로, 어떤 이는 성경 해석의 차이로 이단을 정의하지만 그 기준이 서로 다르다 보니 교계 전체가 하나 된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라고 명한 것처럼, 우리에게는 성경에 굳게 선 분별의 기준이 필요합니다.

옳게 분별하며로 번역된 헬라어오르토토메오는 본래 길을 곧게 내거나 천을 똑바로 재단한다는 뜻을 지닌 단어입니다. 이는 성경을 자신의 필요나 감정에 맞추어 임의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이 본래 의도한 뜻을 정직하고 정확하게 드러내는 해석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이단과 극단적 영성운동의 공통점은 대개 특정 구절을 문맥에서 떼어내어 자신들의 주장에 꿰맞추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분별의 첫걸음은 새로운 계시나 신비한 체험을 좇는 것이 아니라, 성경 본문을 그 문맥과 전체 흐름 안에서 정직하게 읽어내는 훈련입니다. 한국교회가 분별의 통일된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바르게 자르는해석학적 훈련을 함께 회복해야 합니다.

교회사를 통해 검증된 극단적 영성운동은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기독교와 타 종교·철학·과학을 무분별하게 뒤섞는 극단적 혼합주의로, 고대의 영지주의가 그 대표적 모델입니다. 둘째는 성경의 권위를 넘어선 새로운 계시와 예언을 주장하며 임박한 시한부 종말론에 빠지는 극단적 갱신주의로, 몬타누스파가 그 모델입니다. 셋째는 도덕적으로 깨끗한 사람들만으로 교회를 구성하려다 교회의 일치를 깨뜨리는 극단적 분리주의로, 도나투스파가 그 모델입니다. 이 세 유형의 잣대를 우리 주변의 의심스러운 집단에 대어 보면, 특정 교단의 교리가 아니라 전 교회가 공감할 수 있는 기준으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2. 종교개혁 이후 칼빈으로부터 다시 확립되기 시작한 복음적 성령론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러 세기를 거치며 풍성해져 왔습니다(고전 12:13).

초대교회의 성경적 성령론은 중세 천 년을 지나며 희석되고 왜곡되었으나, 종교개혁을 기점으로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한 세기, 어느 한 교단에만 머무는 편협한 성령론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 검증된 통전적 성령론 위에 서야 합니다.

칼빈은 성령을 가리켜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끈이라 불렀습니다. 그는 성령의 사역을 말씀과 분리된 신비한 체험으로 축소시키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성령을 단지 이성적 확신의 원리로만 축소시키는 것도 경계했습니다. 이러한 균형 잡힌 성령론은 이후 청교도들의 실천신학, 그리고 근대 부흥운동의 건강한 흐름 속에서 계속 계승되고 풍성해져 왔습니다.

실제로 16세기 칼빈으로부터 17세기 청교도, 18세기 웨슬리와 조나단 에드워즈, 19세기 부흥운동, 그리고 20세기 이후의 오순절 운동과 은사 갱신 운동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와 전통은 저마다의 강점을 교회에 남겨 왔습니다.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정결의 모티브를, 개혁파 전통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모티브를, 오순절 계통은 복음 증거의 능력을 각각 풍성하게 발전시켜 왔으며, 오늘날에는 이 전통들이 서로의 장점을 받아들이며 하나의 통전적 성령론으로 수렴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배우는 성령론은 어느 한 사람이나 한 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이천 년의 교회사 전체가 함께 다듬어 온 신앙의 유산입니다. 이 역사적 안목을 가질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극단적인 유행이나 일시적 체험에 흔들리지 않고, 성경과 교회사가 함께 증언하는 견고한 터 위에 설 수 있습니다.

3. 이단을 무조건 정죄하기보다, ‘경계 집단 사랑으로 진리의 길로 돌이키게 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딤후 2:15).

한국교회는 그동안 정통과 이단이라는 경직된 이분법으로 극단적 영성을 대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접근은 잘못된 방향으로 빠져드는 이들을 정죄하기는 쉬워도, 그들을 다시 좋은 방향으로 선도하기는 매우 어려운 구조를 만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정통과 이단 사이에 하나의경계 집단‘(DMZ)이라는 개념을 두는 것입니다. 아직 극단으로까지 나아가지 않았으나 위태로운 경향을 보이는 집단이나 개인이 있다면, 이들을 무조건 이단으로 정죄할 것이 아니라 어떤 점이 성경에서 벗어나 있으며 무엇을 바로잡아야 하는지를 사랑으로 분명하게 가르쳐 그들이 다시 진리의 길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또한 이러한 분별이 힘을 얻으려면 어느 한 교단의 잣대가 아니라, 여러 복음적 교단이 함께 공인할 수 있는 연합적인 분별 기준이 필요합니다. 교회사 속에서 모든 복음적 교단이 공통으로 인정해 온 세 가지 극단적 유형혼합주의, 갱신주의, 분리주의을 기준으로 삼을 때, 우리는 특정 교단의 이해관계를 넘어서서 초교파적으로 일치된 분별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른 분별의 목적은 언제나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극단적 영성을 정확히 가려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이들을 복음적으로 잘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함께 붙들 때, 우리의 분별은 정죄의 도구가 아니라 참으로 사랑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C. 적용

1. 나는 새로운 영적 가르침을 접할 때, 성경과 교회사에 비추어 신중하게 분별하고 있습니까?

2. 나의 신앙이 어느 한 시대나 한 교단의 강조점에만 갇혀 있지 않은지 점검하며, 통전적인 복음적 성령론을 배우려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D. 결론

바른 분별은 정죄를 위한 무기가 아니라, 형제를 온전한 복음으로 이끌기 위한 사랑의 도구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진리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역사를 통해 이어져 온 복음적 성령론의 유산을 굳게 붙들기를 원합니다.

마침기도: 조영구 목사

오겹줄 나눔

오겹줄 모임을 갖고 오겹줄 모임에서 기도하고 마칩니다.

  1. 감사 나눔으로 시작합니다.

  2. 나는 그동안 이단이나 극단적 영성을 어떤 기준으로 분별해 왔습니까?

  3. 역사 속에서 이어져 온 복음적 성령론을 배우는 것이 나에게 왜 중요합니까?

기도제목

  1. 진리의 말씀으로 바르게 분별하는 지혜를 더하여 주소서.

  2. 모범적인 가정교회, 모범적인 목장을 세우게 하소서.

  3. 마음에 품고 있는VIP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대표기도: 김재훈 형제

말씀

베드로전서 1: 23

여러분은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것은 썩을 씨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않을 씨 곧 살아 계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9일차. 공동체를 새롭게 하시는 성령

A. 도입(문제 제기)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개인의 신앙생활에만 국한시키고, 가정과 교회와 사회라는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소홀히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 한 사람의 거듭남이 공동체 전체를 변화시키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 교회와 가정이 진정 거듭난 공동체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까?

 

B. 말씀의 교훈

1. 성령께서 원하시는 첫걸음은 거듭난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벧전 1:23).

개인이 썩지 아니할 씨, 곧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으로 거듭나듯이, 공동체 역시 그 말씀 위에서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성령은 개인을 성화시키시는 것과 동일한 과정과 목표를 가지고 우리의 공동체 속에서도 일하십니다.

베드로전서 1 23절의 헬라어스포라스‘()는 생명을 품고 있어 반드시 열매로 자라나는 원리를 가리킵니다. 베드로가 이 단어를 사용하여 거듭남을 설명한 직후, 곧바로 22절에서형제 사랑뜨겁게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나아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개인적 거듭남은 반드시 공동체적 사랑의 열매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자연스러운 논리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을 개인 구원의 사건으로만 이해하고 멈추어 버리면,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거듭남의 절반만을 붙잡은 것입니다. 참된 거듭남은 반드시 하나님이 우리를 새로운 공동체, 곧 교회의 지체로 접붙이시는 사건과 함께 일어납니다.

성령께서 거듭난 공동체 안에서 이루시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일은 서로 죄를 자백하고 용서하는 삶입니다. 한국교회 최초의 부흥이 일어났을 때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신자들이 자신의 죄를 서로 자백하고, 멀리 떨어진 사람에게까지 찾아가 지난 잘못을 용서받으며, 훔친 것을 갚아 주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정직한 자백과 용서의 문화가 회복될 때, 교회는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공동체로 세워져 갑니다.

2. 성령은 가정과 교회와 이웃과 사회 속에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확산시켜 가십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이 제네바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구현되는 도시를 세우기 위해 평생을 애썼듯이, 성령 받은 우리 역시 개인적 성화를 넘어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켜 가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칼빈의 제네바 개혁은 단지 교회 예배의 개혁에 머무르지 않고, 구제 제도와 교육 제도, 심지어 도시의 질서 있는 삶의 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가 결코 예배당 안에만 갇혀 있지 않으며, 거듭난 성도들의 삶을 통해 가정과 일터와 사회 전반으로 흘러가야 함을 역사적으로 보여 주는 실례입니다. 역사가들은 교회의 통치가 세상에 실현된 대표적인 두 사례로 중세 교황권의 절정기와 더불어 바로 이 칼빈의 제네바 사역을 꼽습니다.

오늘 우리의 가정과 일터와 이웃 관계 속에서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우리가 거듭난 사람으로서 정직하게 일하고,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고, 가정에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드러낼 때, 그것이 곧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이 세상에 확산시켜 가시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3. 성령께서는 예배와 설교의 시간을 통해 공동체를 치유하고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자유케 하십니다( 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4:2)라는 말씀처럼, 치유와 회복은 신구약 전체에 흐르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육체의 질병 상당수는 영혼의 부조화와 병적 현상이 몸에 반영된 결과일 때가 많으며, 그렇기에 성령께서는 공동체 안에서 개인의 육체적 질병까지도 자주 치유하십니다.

동시에 성령께서는 공동체를 억압하는 어두운 영의 세력으로부터도 자유케 하십니다. 요한일서가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고 선언하는 것처럼, 말씀과 기도와 찬양이 함께하는 예배의 시간이야말로 어둠의 세력이 공동체로부터 벗겨져 가는 가장 대대적이고 공개적인 시간입니다.

설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는 사람들의 감각이나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시간이 아니라, 히브리서 4 12-13절의 말씀처럼영과 혼을 찔러 쪼개기까지 하고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감추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앞에서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는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함께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동체의 치유와 회복을 개인적 상담이나 특별한 프로그램에만 의존하지 말고, 무엇보다 예배와 설교라는 가장 기본적이고 정기적인 은혜의 통로를 통해 성령께서 일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려야 합니다.

 

C. 적용

1. 나는 나의 신앙을 개인적 차원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내가 속한 가정과 교회 공동체의 변화를 위해 기도하며 헌신하고 있습니까?

2. 오늘 내가 속한 공동체 중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 가장 필요한 영역이 어디인지 구체적으로 찾아보아야 합니다.

 

D. 결론

성령의 역사는 나 한 사람에서 멈추지 않고, 가정과 교회와 사회 전체를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켜 가는 크신 목적을 향해 나아갑니다. 오늘도 우리가 속한 공동체

마침기도: 조영구 목사

오겹줄 나눔

오겹줄 모임을 갖고 오겹줄 모임에서 기도하고 마칩니다.

  1. 감사 나눔으로 시작합니다.

  2. 우리 교회와 가정은 얼마나거듭난 공동체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까?

  3. 내가 속한 공동체를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키기 위해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기도제목

  1. 우리 가정과 교회가 진정으로 거듭난 공동체로 세워지게 하소서.

  2. 내가 속한 공동체 속에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풍성히 확산되게 하소서.

  3. 마음에 품고 있는VIP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대표기도: 하경옥 자매

말씀

사도행전 19: 6

그리고 바울이 그들에게 손을 얹으니, 성령이 그들에게 내리셨다. 그들은 방언으로 말하고 예언을 하였다.

10일차. 성령의 주되심 — 전 생애의 결론

A. 문제제기

지난 아홉 날 동안 우리가 배운 성령에 관한 모든 진리는 결국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까? 우리의 삶에서 성령이 진정한주인으로 계신 영역과, 여전히 내가 주인 노릇하는 영역은 어디입니까? 우리는 성령의 은사와 능력은 사모하면서, 정작 그분의 전적인 주권적 통치에는 온전히 복종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B. 말씀의 교훈

1. 에베소의 제자들은 요한의 세례만 알다가, 바울을 통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안수함으로 성령이 임하시는 온전한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19:1-7).

이것은 단지 종교적 지식이나 부분적 신앙에 머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온전한 복음 안에서 성령을 인격적으로 모시고 그분의 다스림을 받는 삶으로 나아가야 함을 보여줍니다.

에베소의 이 열두 제자는 세례 요한의 회개의 세례는 알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오순절에 부어지신 성령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습니다. 이는 단지 지리적으로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복음의 전체 그림 중 일부만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 마침내 그들이 성령의 임재를 온전히 경험하도록 인도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오늘 우리에게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혹시 복음의 어떤 부분죄 사함은 알지만 성령의 인격적 다스림은 모르는 채로, 혹은 그 반대로만을 붙들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참된 회심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온전한 통치를 받아들이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2. ‘성령의 주되심 우리가 지난 아홉 동안 배운 모든 진리가 마지막으로 도달해야 자리입니다.

삼위일체, 거듭남, 성령의 열매, 성결, 충만, 세례와 능력, 치유, 분별, 공동체에 관한 진리는 모두 하나의 결론을 향합니다. 성령의 삶이란 결국 우리의 전 존재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관계와 사역까지를 성령의 온전한 통치 아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3 17절에서주는 영이시니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퀴리오스)라는 칭호는 구약에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사용되던 최고의 주권적 호칭이며, 바울은 이 칭호를 성령께 그대로 적용합니다. 이는 성령이 단지 우리를 돕는 보조적 능력이 아니라, 우리의 전 존재와 삶 전체에 대한 절대적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는 선언입니다.

성령의 주되심‘(the Lordship of the Holy Spirit)이란, 그리스도인의 삶과 복음 전파의 주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위격으로 각 신자 안에서 인격적으로 인도하시는 사역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 통치는 신자가 순간마다 성령의 임재를 의식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삶을 통해 구현되며, 그 목표는 두 방향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내향적 목표로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외향적 목표로서 주님의 지상명령인 복음 전파를 위해 능력을 받는 것입니다. 이 두 목표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고 은사를 동반한 복음 증거의 능력는 오늘날 여러 신학 전통이 서로의 장점을 나누며 함께 지향해 가고 있는 통전적 성령론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지난 열흘간 배운 모든 진리성령의 신성, 거듭남, 연합의 열매, 거룩함, 충만, 능력, 치유, 분별, 공동체적 회복는 결국 이 하나의 자리로 우리를 이끕니다. 곧 성령을 단지 필요할 때 찾는 능력의 근원으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관계와 재정과 미래까지 다스리시는 참된 주()로 인정하고 그 통치에 순종하는 자리입니다.

3. 오늘날 여러 신학 전통은 각자의 강점을 서로 나누며 하나의 통전적 성령론으로 수렴되어 가고 있습니다.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본래 정결(Purity)의 모티브를 최대의 강점으로 지녀 왔으나, 최근에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도 눈에 띄게 포용적인 태도로 변화해 왔습니다. 개혁파 전통 역시 그리스도와의 연합 모티브를 최대의 강점으로 지녀 왔으나, 전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던 방언이나 신유의 은사, 기사와 이적을 전도 현장에 적용하려는 시도가 점점 확대되고 있습니다.

오순절 계통에서도 변화가 나타납니다. 한때는 방언을 성령세례 받은 첫 증거로 강하게 주장했지만, 최근에는 방언을 여러 은사 가운데 하나로 보는 시각이 짙어지고 있으며, 동시에 상대적으로 약했던 그리스도와의 연합 모티브와 정결 모티브를 함께 보강해 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출발점을 가졌던 세 전통이 결국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통전적 성령론이 지향하는 가장 보편적인 두 특징은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 모티브, 그리고 은사를 동반한 복음 증거의 능력입니다.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가 말했듯이, “성령 안에서 살고 성령 안에서 걷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지금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순간마다 의식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성령의 주되심이 우리 삶 속에 구현되는 실제적인 모습입니다.

골로새서 3 23절은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이야말로 지난 열흘 동안 우리가 배운 모든 전통과 모든 교훈이 마침내 하나로 모이는 지점입니다. 어느 교단에 속해 있든, 우리가 순간마다 성령의 임재를 의식하며 모든 일을 주께 하듯 감당할 때, 우리는 이미 통전적 성령론이 지향하는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C. 적용

1. 나는 내 삶의 모든 영역가정, 사역, 재정, 관계, 미래을 성령의 주권적 통치 아래 온전히 내어드리고 있습니까?

2. 오늘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하루하루를, 지난 열흘간 배운 성령에 관한 진리를 삶으로 살아내는 실제적 순종으로 이어가야 합니다.

 

D. 결론

성령의 삶이란 결국 우리의 전 생애를 성령의 주되심 아래 내어드리는 삶입니다. 오늘 이 새벽, 우리는 지난 열흘간 배운 모든 진리 위에서 성령을 우리 삶의 참된 주인으로 다시 한번 온전히 모시기를 원합니다.

마침기도: 조영구 목사

오겹줄 나눔

오겹줄 모임을 갖고 오겹줄 모임에서 기도하고 마칩니다.

  1. 감사 나눔으로 시작합니다.

  2. 지난 열흘간의 새벽기도를 통해 나에게 가장 크게 다가온 은혜는 무엇입니까?

  3. 나는 내 삶의 어느 영역을 성령의 주되심 아래 아직 온전히 내어드리지 못하고 있습니까?

기도제목

  1. 나의 전 존재와 삶의 모든 영역이 성령의 온전한 통치 아래 있게 하소서.

  2. 이번 특별새벽기도회를 통해 받은 은혜가 삶의 실제적 변화로 이어지게 하소서.

  3. 마음에 품고 있는VIP를 위하여 기도합니다.